기말페이퍼_엄기호_[그녀의 강의에 대한 한 글로벌 시민의 관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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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강의에 대한 한 글로벌 시민의 관찰기

: 12월 3일을 중심으로 한 그녀의 강의노트에 대한 주해서


엄기호(문화학과 박사 1학기)


1. 글로벌 시대 인문학의 위기

인문사회과학의 역할을 엔지니어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도구, 곧 사람들이 현상 이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개념을 만들고 퍼트리는 것이다. 근시안적 사유를 넘어서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 자신의 경험이나 딱히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대중매체에 의해 주조되고 유포된 사실이나 관점을 의심해보고 독자적 탐색과 질문을 통해 현실 읽기를 지속해가야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성사회’가 시키는 사유를 넘어서 새 질문을 던지려는 훈련이 필요하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 노트)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유학을 준비하던 중 나는 귀신같이 보따리를 싸서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IMF 경제위기가 터진 직후라 유학을 가기에 재정적 부담도 큰 편이었지만 그것보다 우연히 한국을 방문한 국제가톨릭학생운동IMCS의 아시아담당이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며 자기 단체에 와서 한번 일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 때문이었다. 사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라 무엇을 결정할 때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고 오랫동안 고민해서 결정을 하는 편인데 이 결정은 순간적이었고 전면적이었다. 제안을 듣는 순간 ‘봐, 이것이 너가 가야할 길이야.’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왔다. 망설이고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궁금하였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궁금하였다. 대학원 석사과정 동안 관념적으로 배운 세계화와 지구통합은 나의 경험속에서는 여전히 먼 개념이었다.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잠시잠깐 한번 빠져나가 본 적 밖에 없었던 나는 몸으로 ‘글로벌’을 체험해 보고 싶었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세계화’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불편에 늘 시달렸다. 명쾌한 언어로 이것이 세계화라고 말하고 설명하였지만 어쩐지 그 설명들 역시 ‘세계화’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것이며 IMF 이전의 설명체계와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였다.


자신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것에서 구체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그 문제의식을 풀어낼 마이크로, 마크로 개념들-예를 들어 기업의 철학, 참여/공유/개방의 원리, 정보사회의 속성, 자동화, 알고리즘, 수공업적 생산, 자생적 기반과 복제 가능성 등- 과 연결시키면서 집요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적당하게 넘어가면서 생각을 봉합시켜버리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구체적 경험에 기반하기, 그리고 그 경험과 의문들을 해석, 설명해낼 이야기들을 계속 만들고 수정하면서 자신의 사유 세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내는 사고 훈련 방법을 개발해야 함.(12월 3일, 조한의 특강 노트)


IMCS에 도착하여 후임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워크숍에서 스리랑카에서 온 60대의 늙은 활동가 신부는 대뜸 나에게 ‘아시아가 뭐냐?’고 질문하였다. 한참을 망설이다 나는 ‘한국인에게, 아니 나에게 세계는 미국과 일본이었다. 아시아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아마 베트남과 태국 정도일 것이다. 나에게 스리랑카는 달보다도 더 먼 나라이다. 그게 나에게 아시아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스리랑카 신부는 껄껄 웃으면서 좋은 대답이라며 일을 많이 할 생각보다는 많이 돌아다니라고, 그것이 국제단체에서 일하는 이유라고 격려하였다. 그는 내가 그 단체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하기 보다는 내가 많은 견문을 넓혀 많은 경험을 쌓아 세계에 대한 문리를 트는 것 그 자체가 우리 단체를 위해 가장 큰 일을 하는 것이라고 충고하였다. 너가 IMCS야. 너가 성장하는만큼 IMCS는 성장하는거야. 그 후 지금까지 10년을 아시아의 제3세계와 유럽을 중심으로 유엔과 NGO, 그리고 난민촌이나 빈민촌과 같은 국가의 경계 밖을 오고가는 경험은 ‘글로벌’을 몸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하자센터에서 아이들에게 글로벌 인문학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맨 처음 물은 것이 ‘인터내셔널과 글로벌의 차이가 뭐냐?’였다. 언제부터인 왜 우리는 ‘인터내셔널’이라는 말 대신에 ‘글로벌’이라는 말을 더 쓰게 되었는지를 조사하고 그 이유를 알아오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당황했고, 이러저러한 조사를 하며 ‘김영삼 정부, IMF, 국가, 보다 더 통합된, 국가를 넘어선,’ 등의 언어로 글로벌을 설명하였지만 스스로들도 헷갈려하고 있었다. 제법 공부한 한 아이가 툭 내뱉었다. 이거 그냥 패션같아요. 무슨 말이지? 왜 그런 것 있잖아요. 같은 말인데 좀 더 새로운 말로 쓰면 뽀대나는 거. 아무리 봐도 그런 차이 같아요. 이 아이의 말이 맞다. 십 수년 전에도 그랬다. ‘담론’이라는 말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모든 지식인들이 순식간에 다들 담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한 학생이 물었다.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차이가 뭡니까? 제가 보니 어제까지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쓰던 곳에 담론이라는 말만 그냥 대치한 것 같은데, 뭐가 다른거죠? 담론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치밀하게 사유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맥락’이 바뀌었음을 제대로 설명해내는 지식인들이 별로 없었다. 맥락 없는 언어의 사용. 그것이 ‘헛도는 언어, 겉도는 삶’이라는 언어의 식민화가 아니면 무엇인가?


두 개의 비교 속에 갇히는 경향을 보인다. 비교 연구는 그 둘이 가진 기본적 차이에 바탕을 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맥락에 대한 선행이해가 부족하다. 성급하게 있는 자료를 가지고 일반화 하려는 것, 선정적 이슈화 하려는 것, 이것이 현재 우리 강의실 안의 대체적 경향인 것일까? (그리고 이것은 현 한국사회 인터넷에 의해 주도되는 여론형성의 경향일 것일까?) 두 개의 비교, 대립항으로 사유할 때는 대체로 그 체계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항상 새로움은 그 중간의 변용이 가는 한 mediation 영역/넘나들기가 가능한 영역에서 나온다. 변화기에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지 않도록 유의해야.(12월 3일, 조한의 특강 노트)

이번에 한국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에 대해 가혹한 심판이 내려지고 이명박이 당선된 것은 ‘글로벌’한 현상이다. 좀 전에 끝난 태국의 총선에서도 쿠데타를 통해서까지 쫓아내려고 했던 탁신 정부가 과반에 조금 못 미치는 대승을 거두었다. 몇 개월 전 있었던 대통령 선거가 아니라 세계에 대해 철학적 비젼을 제시하는 담론의 장이라고 평가받는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도 ‘논쟁이 없다’는 지식인들의 불만 속에 사르코지가 당선되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독재자, 아니 21세기의 차르 푸틴은 80%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내년도 대만의 총통선거에서도 민진당의 패배와 국민당의 집권은 기정사실화이다.

이 현상만 보면 ‘먹고 사는 문제’가 도덕이나 비전을 압도하는 것이 세계적인 유행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현상의 이면에는 보다 심각한 변화가 있다. 그것은 근대 정치의 핵심인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대의제도에 대한 전세계 인민의 신뢰의 붕괴이다. 전세계의 정치에 대한 지지가 출렁거리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집권 초기에 과반이 넘는 압도적 지지를 받던 정부들이 몇몇 푸틴이나 태국처럼 ‘대중주의적 독재 정권’을 제외하고는 육개월도 되지 않아서 지지율이 반토막으로 꼰두박질 당하며 ‘전후 최악의 지지율’을 연일 갱신하고 있다. 미국의 부시는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이며, 일본의 후쿠다 총리는 총리가 된지 일년도 되지 못해서 지금 조기개각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영국의 브라운 총리 역시 지지율이 꼰두박질 당하며 지금까지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모두 다 패배하였다.

요컨대 지금 독재에 가까운 대중주의적 정권들이 출현하는 것이나 기존의 정치시스템이 불안정을 겪고 있는 것은 말 그대로 글로벌한 현상인 셈이다. 보드리야르의 표현대로 하면 정치와 인민의 분리, 인민의 대의로서의 정치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이 전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한국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87년 체제의 종말이고 사회의 보수화이겠지만 지구적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근대 정치 체제의 위기, 혹은 종언인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학자들 중에서 이 현상을 글로벌한 맥락에서 파악하며 그 위기의 심층부까지 가는 분석을 통하여 근대 정치 체제의 위기 그 이후의 정치는 어떻게 재구성되어야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정치학자를 아직 한명도 보지 못했다.

인문학의 위기가 있다면 인문학을 둘러싼 제도적 위기도 있겠지만 보다 더 정확하게 본다면 사태의 맥락을 파악하는 역량의 부재, 그 역량의 부재속에서 꼼꼼하게 읽기보다는 아주 손쉽게 편들기로 귀결되어 버리는 것이 정말로 인문학의 위기일 것이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 선거 때 난무하던 지식인들의 누구누구 지지선언은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지식인들의 현실참여는 늘 권장되어야하는 것이지만 지식인으로서 자신들이 이 정치와 인민의 분리라고 하는 근대 정치의 위기에 대응하여 어떤 대책이 있는가에 대한 고민 없이 니편과 내편이라는 정치공학만이 존재하였다. 지식인이 참여가 아니라 편들기에 나설 때 그 사회에 희망이 있는가? 문제는 이것이 비단 지식인의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사업장, 학교 교실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민족주의‘가 그런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들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소속감과 글로벌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어쩐지 네이버가 좋다.” “어쩐지 김정우씨 편을 들어야 할 것 같다” “구글 쪽이 멋진데 어쩌나” 식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물론, 자신의 ‘마을’에 대한 애정은 중요하다. 바로 그렇기에, 그럴 수록 자신의 마을을 거리를 두고 상황 판단을 잘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이 애정을 기울일 ‘마을’이 대한민국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하기보다 ‘어떤 대한민국’ 또는 ‘누가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인가를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노트)


2. 글로벌에서 로컬로


함종민씨가 강조했던 “현대 자동차가 해냈으니 우리도...”는 안일한 생각이다. 한국은 토건적 사업과 가격 경쟁을 통해 외화를 많이 벌고 있지만 토건이 아닌 소프트웨어 사업일 때 ‘토착화’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곳 주민이 되어볼 수 있어야 성공할 확률이 높다. 실제로 하드웨어 사업은 그렇게 많은 ‘localization'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라인 포털과 같은 사업은 보다 세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localization을 해내지 않으면 현지적용 모델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인텔이 문화인류학자들을 대거 고용하여 연구를 하는 이유가 이런 데 있는 것. 엄청나게 유능한 문화인류학자들을 통해 사전 조사를 하고 인문사회과학적 훈련을 받는 사원들이 가서 본격적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헤게모니를 쥔 서구의 경우, 비서구 주민들의 ‘선망’이 받쳐주는 한 그런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어도 되었다. 그러나 그 ‘선망’이라는 약발이 먹히지 않을 때는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노트)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에서 글로벌 학교를 하며 가장 호응이 좋았던 프로그램 중의 하나가 아이들과 함께 진행한 ‘영어들 시대의 영어 캠프’였다. 이 캠프는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전남 곡성과 영광에서 두 차례 진행되었는데 하자 글로벌학교의 아이들이 인턴이나 스탭으로 참여하고 지역의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몽골학교 등에서 참가자를 모집하였다. 인턴으로 참여한 하자의 아이들 역시 한학기동안 서울에서 ‘영어들 시대의 영어 수업’에 참여하였는데 이 이름을 짓는 과정은 곧 아이들에게 어떤 영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사실 어떤 영어를 어떤 방식으로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이 났다. 영국식이나 미국식 영어가 아닌 좀 더 탈식민적인 내용과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수준에서 원리에 대한 말은 쉽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이름으로 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토론을 했다. 이름이라는 것이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드러내 주지 않는가? 문제는 문제의식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그것의 실현방법도 그럴싸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랜 장고 끝에 꽤 괜찮다고 정해진 이름이 “영어‘들’시대의 영어 수업”이었다.

영어‘들’시대의 영어 수업이라고 이름을 지은 데에는 경험에서 유래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처음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이 영어였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성문 영어’를 보고 공부하며 자란 전형적인 세대인지라 말하고 듣기에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다 불평하듯이 한국의 영어공부의 병패가 온몸에 ‘육화(肉化)’되어 있는 존재였다. 그러던 나의 두통을 한 번에 날려준 사건이 처음 참석하였던 국제회의였다. 그 자리는 세상에 영어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 심지어는 서로 소통 불가능한 영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영어‘들’의 향연이었다. 심지어 사석에서 너무나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던 한 학자는 연단에 서자마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인도식 악센트로 따발총처럼 말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영어는 토착화된 영어라고. 진짜 지식인(intellectual)은 그렇게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어(The English)에서 해방되어 나의 영어(an english)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왜 글로벌 해야 하나? 글로벌 시대이니까. 이 질문은 아마도 대원군 시대에 지식인들 역시 내내 되물었을 질문일 것이다. 자신이 글로벌 해지지 않아도 되는지, 한국이라는 국가가 개방을 하지 않아도 되는지, FTA, Creative Commons, 차원은 ‘기후변동’ 문제를 풀기 위해 글로벌 운동을 해야 하는 것과도 같은 선상에 있는 문제. 글로벌 시장만이 아니라 글로벌 시민사회의 차원에서도 글로벌리제이션을 해내지 않으면 해법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 노트)


두 번째 경험은 인도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하였을 때이다. 수많은 인도의 지식인들이 연단을 차지하고는 미국과 미국적인 것, 제국과 제국적인 것,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지역적인 것, 토착적인 것, 민족적인 것의 중요성과 그것을 옹호하자고 ‘영어’로 격정적으로 외쳤다. 그 감명적인 연설들 후에 숙소로 돌아와서 세계사회포럼에 초청받지 못한 한 학자와의 간담회가 있었다. 그 학자는 인도적인 것으로 반세계화를 외치는 그들은 ‘브라만 집단’들이며, 그들은 ‘우리 불가촉천민’들을 영원히 ‘지역적인 것’에 대한 강조 속에 저들의 ‘인도적인 착취구조’에 가두어두기 위한 수작이라고 질타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은 장려하지만, 우리 불가촉천민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포섭된 것이고 오염된 것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한지 꽤 오래되고 난 후 한국에서 어떤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의 경험이다. 한 참석자가 탈식민적 인식론의 필요성에 대해서 꽤나 길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로 간 자리에서 그 회의를 준비했던 간사가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며 어디를 가서 어떻게 공부를 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필리핀보다는 말레이시아나 인도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추천을 하였다. 조금 전까지 ‘탈식민주의’ 인식론을 이야기하던 그 사람이 대뜸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니 그 식민지 영어는 배워서 뭐할려고?’

우리 교육현장의 문화다양성과 문화다원주의 교육의 병폐의 핵심은 두 번째 경험과 세 번째 경험 사이에 갇혀있다. 유감스럽게도 첫 번째와 같은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탈식민, 다양성, 지역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언제나 순수한 원형질로의 회귀이거나 아니면 인식론적인 선언에 그친다. 전자는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낭만화하는 민족적/종교적 근본주의의 위험함에 빠지며 지역적 착취와 억압, 차별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기제로 전락한다. 인도에서 그것이 힌두교라는 종교에 대한 강조하면 한국에서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강조이다.

주로 이런 방식의 ‘문화다양성’에 대한 교육은 초등에서 중등까지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고 수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내부의 차이는 봉쇄된다.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이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에서는 우리 내부의 차이와 그것에 대한 인정을 이야기한다. 대부분 인권적 시각에서의 접근이다. 다름에 대한 차별과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대라는 보편적 인권론에 근거한 접근이다.

그리고 최근 하인스 워드의 출현은 여기에 힘을 좀 더 보탠 것으로 이야기된다. 혼혈에 대한 갑작스러운 이 관심은 우리 내부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듯하다. 우리가 내부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지 않는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한다는 성찰들이 막 시작된 듯하다. 심지어 ‘우리 모두는 혼혈’이라는 과격한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뜯어보면 하인스 워드의 출현 이후 혼혈들에 대한 인권과 그들의 잠재력에 대한 강조조차 대단히 민족주의적이다. 여전히 그들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우리 모두가 ‘혼혈’인 ‘한국인’이라는 틀 속에 갇혀있다. 우리 모두가 한 핏줄에서 우리 모두가 혼혈로 ‘하나’되었다. 차이를 인정하는 방식조차 차이를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지만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횡포한 인류의 일원이기도 하고 지방을 억압하는 서울의 주민이기도 하고 지방대출신들을 생각없이 무시하곤 하는 이른바 일류대를 다시는 학생이기도 하고, 또 오로지 충성을 바칠 곳은 자신을 평생 먹여 살려줄 수 있는 부자 부모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일수도 있다. 여러개의 정체성, 여러개의 충성을 바칠 곳을 가진 사회성원으로서의 자신을 보다 잘 인식해갈 필요가 있다. 더욱이 급변하는 현 시대에 우리는 ‘형성되는 주체’이지 이미 결론이 난 ‘고정된 주체’가 아니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노트)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이 이끄는 교육현장으로 가보자. 이분들의 무대는 주로 대학 강단이다. 여기서 탈식민과 문화다양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인식론이다. 우리 내부와 언어가 얼마나 식민화되어 있는가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제로서의 탈식민주의이며, 지구적인 헤게모니에 지역적인 것을 살리자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은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참으로 무력하다. 당장 영어교육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미국식/영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은 한국말만 해야 하는가? 이런 민족주의적 접근에 대해서도 이들은 반대한다. 그럼 어떤 영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치자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우물쭈물한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양쪽 모두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물과 기름처럼 이분법적인 것으로 가른 다음 그것을 인식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식민과 문화다양성은 인식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진화’해야 한다. 영어공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사실 허탈하게도 탈식민화된 영어란 바로 콩글리쉬이다. 싱글리쉬(싱가폴의 지역 영어)나 인글리쉬(인도의 지역영어)와 소통 가능한 콩글리쉬를 통해 들을 귀를 만드는 것이 탈식민화된 영어공부이다. 그것은 본토영어라는 이름으로 미국식/영국식 영어를 혹은 원어민영어라는 이름으로 앵글로색슨들의 영어를 중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어들을 한 지역의 영어로, 한 인종의 영어로 가두어두는 것이다. 미국식/영국식 혹은 화이트 앵글로색슨의 영어를 영어‘들’ 시대의 한 영어로 축소, 혹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일등 오리지널 영어와 이등 식민지 영어라는 이분법에 갇혀있는 한 우리는 내내 주눅 들어 살 것이고? ‘글로벌’하게 진화하지 못할 것이다.


일등의 환상을 버린다. 세컨드 클라스로 현지 적응해야 할 지 모른다. 이것은 현재 대만이 취한 전략이다. 지금은 대원군적 시대 고민을 하는 시점, 그 시대 고민을 푼 방법에서도 뭔가를 배워야 함. 정보사회, 글로벌 시대로의 패러다임 전환기임을 잊지 말 것. 이때 핵심은 공개, 참여, 공유의 시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시공간을 통해 새로운 영역이 열리는 것, 새로운 영역을 열기 위해 가장 핵심은 '다양성' '진화'는 다양성의 조직화를 통해 이루어진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노트)


물론 한국말도 잘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한국말에는 사투리도 포함되어야 한다. ‘바른말 고운말 쓰기’라는 이름으로 표준어는 한편에서는 지역 사투리를 말살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영어에 맞서 수호하여야할 민족정체성의 핵심이었다. 후자에서 표준어는 문화다양성에 의해서 보호되어야할 지역적인 것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것에 의해 이미 수많은 사투리와 지역적인 언어들이 파괴되었음에도 자신은 지켜져야 할 지역적인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다. 이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이것은 실현시킨 것이 바로 교육현장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지구화시대에 우리 교육 현장에서 문화다양성과 탈식민주의는 그것을 하나의 규범, 즉 지구적인 수준의 헤게모니적인 것에 맞서기 위해 지역의 헤게모니적인 것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규범으로 담론화되어 있다. 이것은 결국 전지구화 시대에 위기에 처한 지역의 엘리트들의 지적 헤게모니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이것은 탈식민과도 문화다양성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지역토호세력의 헤게모니와 이권 지키기에 불과하다.

지금 늘 다른 것과 융합되고 변이되며 ‘지금 이 자리’에 속해 있는 실천적인 ‘토착적인 것’과 영원히 과거에 흘러들어가는 ‘토호세력의 헤게모니/이권에 속한 것’은 쉽진 않지만 구분해야한다. 따라서 교육현장에서 문화다양성으로 발견되고 이야기되고 옹호되어야하는 것은 교육현장에 와 있는 학생들의 삶에서 이미 실천되며 재구성되고 있는 지역적인 것, 탈식민적인 것이다. 이미 훌륭히 지역적이고, 지역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콩글리쉬와 같은 것 말이다. 다만 교육현장에서 의식적으로 실천해야하는 것은 이 콩글리쉬를 살짝 비틀고 열어 다른 지역 영어와 소통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것 역시 다른 지역 영어‘들’과의 소통, 그 자체가 소통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본토 영어 원어민 ‘일등’ 영어로의 회귀가 아니라. 소통가능성과 다양성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는 문화'다양성' 교육이 절실하다. 산업화에는 늦었지만 정보화에서는 앞서가자는 한국 사회와 기업, 그리고 대학의 교실은 어떠한가?


지난 주 김정우, 윤종수 판사 두분이 보여준 대비와 매우 흡사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한분은 글로벌 전망에서 글로벌 사업을 하는 분이고 다른 분은 한국적 상황에서 작업을 해왔고, 글로벌 차원으로 뻗어가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사실상 그 글로벌 차원에 대한 그림이나 전략은 여전히 국민국가적 틀안에 갇혀 있는 편이다. 한국의 레식 교수인 셈인 김정우씨가 실제 레식 교수와 어떤 관계, 소통을 할 수 있을 지와 마찬가지로 나는 한국의 최고의 회사라면 NHN도 구글이 그리는 글로벌 그림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자신들이 해낼 영역을 분명해 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12월 3일, 조한의 수업노트)


3. 교사로서의 ‘나’- 비판의 교육학을 넘어: 대안은 대안‘안’에서만 보인다


그런데 실은 더 큰 적이 우리 안에 있다. 점점 더 사람들이 너무나 예민하고 까다로와 지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을 보면 개인에게 행해지는 아주 작은 횡포에 무척 민감하다. 내가 초대한 대표에게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움찔 하는 것에서 보듯. 그러나 거대한 폭력이 자행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techno-mascular 고도 관리 기술 자본주의 지배의

놀라운 효과가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는 이래서 무섭다.(11월 7일, 조한의 특강 노트)


나는 경영학이 유용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해 아무런 나쁜 감정이 없지만 경영학의 원리로 인간의 가치영역이 대치하려 한다면 그 위험천만한 행위는 사절이다. 공동체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합리적 경영만을 한다는 것, 이윤의 극대화를 추진하는 것, ‘고용 없는 성장'을 지향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고도 자본주의는 국가를 포함한 모든 공동체적 기반을 허물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공동체적 대처의 근간이 무너진 상태에서 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이윤 극대화의 추구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한다. 예전의 기업과는 달리 신자유주의 시대의 기업들이 더 힘든 것은 공동체적 기반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나름의 공헌을 하면서 기업활동을 해가야 하는 ‘의무’를 갖게 된 때문이다.(11월 7일, 조한의 특강노트)?


하자에서의 경험도, 그리고 이번 지식정보사회, 지구촌 시대의 문화인류학 등 학부 수업을 참관하면서 현장에서 만난 교사들의 우려에 공감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고통 받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 자신이 비록 그 고통을 체험해 본 적은 없었어도 가슴아파하거나 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이 그런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앞에서 무감각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고통을 마주대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짜증을 내고 있다.

얼마 전 만난 한 아이는 요새 지식네트워크에서 하고 있는 <88만원 세대> 책 읽기에 동참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에게 이 책이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우리 시대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있는 멋진 책이라고 말을 하자 그 아이는 당황하였다. 그가 왜 당황하는지를 묻자 아이는 이렇게 암담한 책이 무엇이 좋으냐고 되물었다. 읽어도 희망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끔찍한 모습밖에 안 보이고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짱돌을 들라’는 황당한 이야기만 하는 이런 책을 왜 읽어야하는지를 모르겠단다. 나처럼 늘 ‘희망’적인 것을 불러 넣어주는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이 책을 적극 추천하는 것도 당황스럽다고 하였다.

이 아이뿐만이 아니다. 대학교의 강의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얼마 전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씨의 특강 이후에 한 동아리의 게시판을 들어가 보았다. 화를 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자기들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며, 왜 이런 절망적인 이야기를 자꾸 들려주는 것이냐고. 몇몇 아이들은 오히려 이런 비참과 절망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는 것이 자신들을 더 둔감하게 만들뿐이라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세상은 이미 절망스럽고 자신들은 이걸 충분히 보고 듣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는 무엇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얻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열심히 하는 이유는 오로지 열심히 하지 않았을 때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것이고, 열심히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관적일 뿐이다. 이런 시대에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복적인 노출은 타자에 대한 윤리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무감각과 현실에 대한 냉소와 공포만을 생산할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다 알고 있지만 토론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우리 수업 쪽글만 봐도 다들 알고 있다. 발설을 공공석상에서 안 하거나 고치기 위한 장을 마련하지 않는 것이 문제. 왜 토론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자세의 차원에서 문제가 있는 것? 이것은 아마도 ‘불안시대’인 현 분위기와 관련이 될 것이다. 아침에 신문사 기자가 코멘트를 바란다면서 어른들이 영어 스파르타식 학원에 몰려드는데 그곳에서는 숙제 안 해오면 때리기도 하고 아주 엄한 훈련을 시킨다고 했다. 왜 그런들이 그런 곳에 몰려가는지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달라는 주문. 나는 ‘불안’ 개념으로 이것을 설명해주었다. 결국 함께 있으면서 힘이 되는 관계, 토론을 하면서 지혜를 만들어가고 문제 해결을 해갈 수 있는 자기 마을이 있어야 한다. 학생들끼리 좋은 토론을 만들어갈 수 있으면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사물, 현상을 명료한 눈으로 볼 수 있고 토론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가장 커다란 희망사항.(10월 29일, 조한의 특강 노트)


확실히 아이들의 마음은 냉소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얼마 전부터 가장 주목받고 있는 유럽의 지성중의 한명인 슬라보예 지젝이 포스트모던 사회를 공격하며 했던 말처럼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냉소주의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 냉소이다.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행한다.’는 것이었다면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사실은 잘 알아서) 행한다’는 것이다. 알고 하는 것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이 냉소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의 역사에서 한 특정 국면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상상하기보다는 지구가 아예 통째로 망해버리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지구온난화나 혜성 충돌과 같이 지구의 생태계가 통째로 날라 가는 것에 대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자본주의 그 ‘이후’에 대한 그림을 우리는 한 장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강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론적 실천이 필요하다. 제 3세계일수록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오리지널 한 것을 내기보다

그 사회에 맞는 이론을 내고 그를 위한 실천들을 해가야 함. 온라인 학습 생태계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사업, 연세대 청년문화원이 해온 사업중 하나이다. 대학생들이 대거 합류해서 성사시켜내야 할 사업이고 영감을 얻어내가는 사업이어야 할 것이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노트)


나는 이 지점에서 활동가가 아닌 교사/강사/지식인(앞으로 통칭 교사)은 아이들에게 그 어떤 비전도, 희망도 제시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시대가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독특한 세상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과거에 이야기하던 대안은 일종의 ‘체제 탈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탈출할 바깥이 사라지거나 안 보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대안은 없다’는 신자유주의, 혹은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절망하고 삶을, 저항을, 대안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은 어떻게 만나고 느낄 수 있는가?

글로벌 시민사회운동에 동참하면서 내가 감동을 받고 영감을 얻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활동’이다. 하자의 아이들을 역시 난민촌의 사람들이나 에이즈 감염인들처럼 자신들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어서 도저히 아무것도 안 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긍정적이고, 에너지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삶의 희망과 활동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아이들은 확실히 이들의 불가능할 것 같은 활동에 매료된다. 이들을 통하여 아이들이 만난 것은 바로 ‘가능성이 가능하다’이다.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가능성 자체가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폐쇄되었다고 믿어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 자체가 종말을 고하는 그런 ‘가능성’말고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가능성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움직일 수 있는 여지’의 가능성을 보는 것, 그걸 볼 수 있는 곳과 아이들이 만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사의 역할 중에서 가장 큰 역할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떻게 이런 가능성의 공간을 알 수 있는가? 이것은 교사가 그 가능성의 활동가인 한에서만 알 수 있다. 활동가가 아닌 교사는 사실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이 뒤에서는 편의상 ‘체제’라고 부르겠다.)의 거대함과 완결성에 압도되어 자신이 그 안에 있지 않는 이상 어떤 활동도 그것을 대안으로 인지할 수 없다. 동어반복적이지만 대안은 오로지 자신이 그 대안을 실천할 때에만, 그 ‘안’에서만 보인다. 바깥이 없어보이는 이 압도적인 자본의 전지구화의 시대에 대한 대안은 그 ‘안의 안’, 즉 체제의 구멍을 통해서만 보이고 실천가능하다.

가장 단순한 예를 들어 보자. 요새 많이 이야기되는 지역 먹거리 운동은 과연 이 시대에 대한 한 대안일 수 있을까? 그 운동의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렇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 운동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88만원 세대>를 읽고 하는 토론에서 학생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이다.’가 아니라 ‘이것이 대안이다.’를 제시해달라고 항의하였다. 그 좋은 한 예로 ‘지역 먹거리’를 이야기하자마자 몇몇 아이들은 냉소하기 시작하였다. 겨우 그걸로 이 세상이 바뀌겠느냐고, 그건 너무 ‘쉽고 작은’ 한 사례에 불과하다고 비웃었다. 아이들 역시 이 체제의 거대함과 ‘바깥 없음’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작은 구멍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각자 배워가는 것이 다를 것이고 나 자신도 아주 많이 배운 수업이지만 실은 많이 아쉬운 생각이 든다. 대단한 강사들을 모셔왔지만 학생들이 자기 생각들을 한껏 풀어놓고 궁금증을 스스로 질문으로 만들어내서 그것을 한껏 풀어내지 못한 것 같아서이다. 지금이라도 생각들을 정리해가면서 보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남은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사회과학자는 위에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전체를 ‘조망’하여 현상을 파악하는 것뿐 아니라 자신이 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문제해결을 위한 제안을 해내야 한다.(12월 3일, 조한의 특강노트)


이런 점에서 교육이 이 시대에 희망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비판의 교육학’을 넘어서 아이들의 마음에서 연대성을 회복하는 ‘연대의 교육학’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의 교육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비판’을 통해 아이들이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던 시대가 지나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사회에서 ‘비판’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비판’을 통해서 아이들은 사회의 모순과 ‘정의심’에 입각하여 정의의 사도로서 자신들의 소명을 깨달았다. 따라서 교육은 아이들이 이런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끔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비판이 실천과 주체를 구성하는 힘은 여전히 살아 있는가?

한미 FTA반대 수업을 사례로 살펴보자. 아이들에게 FTA가 한국 농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열심히 가르쳤고 왜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지도 충분히 납득을 시켰다. 또한 아이들이 스스로 FTA의 문제점을 찾고 느껴서 충분히 제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조사와 인터뷰도 하게 하고 모둠별 토론으로 자기네들끼리 논쟁하면서 스스로의 언어와 논리도 만들 수 있게끔 했다. 수업이 성공적으로 아주 잘 되었다면 아이들은 아마 FTA의 문제점을 깨달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30분 정도 논리적으로 농업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설명하고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발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이런 비판의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해서 어떠한 측은지심이나 연대의 마음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을 내어 농촌을 방문하여 농민들의 고된 삶을 보고 경험하는 현장체험을 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뭐가 잘못되었는가? 비판 교육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육학적 방법론 중의 하나가 현장체험이다. 체험을 통하여 아이들이 몸소 그 사건의 심각성을 느끼고 그 사건에 연루된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를 공감하며 그들을 그런 처지로 몰아넣은 사회에 대해 비판 의식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고(See-Judge-Act)’가 비판 교육학의 기본적인 얼개이다. 그러나 이 모델은 행동을 취했을 때 어떤 희망이나 대안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을 때에 작동한다. 오히려 대안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대부분 보고 듣고 느끼고 사회에 비판 의식을 가지고 난 이후에 ‘딱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더 절망하거나 외면하거나 오히려 냉소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 비판이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에 대해 아이들이 체념하고 투항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게끔 이끄는 역효과까지 내고 있다. 심지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구나하는 공포를 느끼고 절대 자신은 저렇게 되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계속해서 나를 움직여 왔던 것은 그 비참한 삶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과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들이 감동을 주고 나를 돌아보게 하고 영감을 주었다. 내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그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었고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었고 아이들에게 그 감동을 주려고 애를 쓸 수 있었고 아이들이 감동을 느낄 때 공명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연대의 교육학이 첫 번째로 주목해야 하는 원리라고 생각한다. 연대의 교육학은 사회적 약자와의 만남에서 아이들이 ‘보고-판단하고(분개하고)-행동하는’ 개인의 인식론적인 성장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감동하고-영감받고(성찰하고)-연대하는’ 관계적 성장을 하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비판이 아니라 만들어가기 (몰입하기 빠져들기) 올타리를 치기보다 초대하기, ‘아무나’가 아니라 제대로 초대해서 초대된 사람들이 제대로 시너지를 내면서 활기 있게 지내게 하기, 자기와 다른 이들과 공존을 위한 시도를 하다가 정 안되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이를 위해? ‘좋은 사회’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신뢰와 불신, 칸막이를 한 사무실, 담장을 두른 거대한 주택, 경비가 막아선 거대한 빌딩. 개인 정보 유출과 스펨 메일 막는데 대부분의 자원을 쓰는 동네에 살고 싶은가? 상대적 박탈감과 적대감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 부작용이 두려워 생각만 하다가 아무 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마는 사회. 창의적 토론이 활성화된 동네. 서로 믿기에 문을 열어두고 지내는 동네, 서로 배려하는 예의를 지녔기에 칸막이 없이도 즐겁게 일하는 사무실, 서로에 대한 코멘트를 상처주지 않고 할 수 있고 상처 받지 않고 받을 수 있는 관계. 나는 어떤 동네에서 살고 싶을까? 그런 동네를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10월 15일, 조한의 특강 노트)


스스로 대안을 경험하고 생산적 소비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 작은 구멍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삶이 걸린 일임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그 작은 실천이 가진 엄격함과 삶의 전영역을 포괄하는 총체성에 ‘압도’당한다. 태국 방콕의 대안마을에서 일을 하고 있는 솜차이(그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건축사로 10여년을 보낸 글로벌 엘리트이다. 50이 넘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태국의 대안마을인 산티아속에 들어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설거지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의 말처럼 ‘신념의 엄격한 실천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는 말에 아이들은 매혹된다. 그 말에 걸려 있는 솜차이의 삶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이 ‘압도’가 전지구화의 거대함의 ‘압도’를 누르는 곳이 바로 산티아속이라는 지구의 티끌보다 더 작은 ‘구멍’안인 셈이다. 이 구멍 안에 있을 때에만, 이 구멍을 체험해보아야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지역 먹거리 운동이 얼마나 많은 윤리적 결단과 끈기있는 일상적 실천을 통해서만 지속적으로 가능한지를 알 수 있다. 교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구멍 안에서 ‘압도’를 경험한 교사만이 아이들에게 이런 ‘가능성의 가능’을 아이들과 교감하며 자기 언어를 통하여 아이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교사들이 스스로 삶에 대해 어떤 가능성의 공간을 살고 있는가를 되물어보게 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대안학교의 교사들조차도 자신들의 의지와 노력과는 달리 대안의 활동가가 아니라 대안학교 ‘안’에서의 교육행위의 수행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자꾸만 학교‘안’으로 묶어두거나 대안학교라는 ‘이름’의 자동적인 움직임에 그저 수동적으로 맡기는 것으로 ‘대안’을 생산하려는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활동가로서의 교사를 단지 어떠어떠한 단체나 공간에서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단체의 소속원이건 아니건 자신의 활동 자체를 대안으로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언어를 풀어낼 수 있는 교사만이 실제로 아이들에게 가능성의 공간을 보여줄 수 있다.


교사로서의 그녀는, 어떠하였을까? 아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다시 떠나야하는 항해의 방향을 보여주는 한 학부생의 마지막 쪽글이다. 잘난 몇 명의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강사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집단지성을 체험하며 자신의 ‘지성’에 대해서, ‘집단’의 지성에 대한 신뢰와 가능성을 보게 한 것. 그리하여 하나의 지성으로서, 집단의 지성으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체험하게 한 것. 그것이 이 강의가 던진 가능성의 공간이었으며 다음 항해의 방향이 아닐까한다.


"이름만 바뀌었지 이건 당신 얘기라고!"(이재민)


The name being changed, this story is about you!

(이름만 바뀌었지 이건 당신 얘기라고!)

자본론 열번째 챕터에 나오는 글귀다. 별 의미부여를 안 했음에도 읽은 그 순간부터 이상하게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수업, 한 수업을 한마디로 정리해 보는 버릇을 이어나가 이번 학기 수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에 적합한 것 같다. 두 가지 차원에서다.

첫째로, 매주 수업에서 다룬 다양한 인터넷 세계에서의 양상들이 '현실' 세계에서 터져 나오는 각종 문제적 측면들을 고스란히 '이름만 바꾼 채' 반영하고 있었다는 깨달음이다. 스스로 기술결정론적으로 정보사회를 규정하고 사회학적 주제가 담겨 있음을 부정했었기에 나는 명민하지 못 했다. 이것이 사회학적 주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강연자 그리고 우리가 나눈 모든 이야기들에 '사람'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과 계급, 차별과 배제, 등등 재밌는 주제가 고스란히 인터넷에 있었다. 나의 인터넷 생활 뿐만 아니라 앞으로 공부하고 사유해 나갈 방향에 대해 필수적인 표지판을 보게 됐음을 강조하고 싶다.

둘째로, '나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수업 초반부에 맥을 못 잡고 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맥락에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 세계의 문제점은 ''내가 아닌 너의 이야기'로 여기게끔 하는' 컨텍스트에 있음을 알게 됐다. 수업의 바탕을 이루는 질문들이 좋았다. 그것은 일상에 놓여 있었고, 덕분에 경로의존성이 극대화되어 있었던 나의 일상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가지사이트. 이번 수업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생산성이 뭔지를 보여줬다고나 할까. 심혈을 기울여 매주 공개쪽글을 써내려나간 학우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당신들의 '글빨'이 만들어낸 공유지식 내지는 집합지성은 지금껏 어디에서도 얻지 못 했던 싱싱한 성질의 것이었다. 프로슈머적 감수성을 얻어가는 게 이번 수업의 목표라면, 이 사이트에서의 작업 하나로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본인이 그리 왁자지껄하지 못하여 숙제 및 음악 게시판 외의 타 게시판에서 게시물을 그리 올리지는 못 했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감상과 사유를 할 수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른 수업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을 도입했으면 좋겠다. 교수의 일방통행적 지식을 뼈빠지게 필기해 좋은 학점 받는 것도 물론 좋지만, 다른 학우들의 사고 체계를 통한 리플렉션들은 자신의 담론을 생산적으로 구조화 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 '양적 평가'의 압박에 '글 업뎃'만 지지부진하게 이루어지는 '와이섹 토론방'과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흐흐.



<참고문헌>


보드리야르, 장, 2006, 세계화와 과잉 시뮬라시옹 시대를 응시하기, 서울대담

엄기호, 2006, 문화다양성과 탈식민주의, 아르떼 24호

______, 2007, 연대의 교육학 1, 월간 우리교육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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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 2007, 연대의 교육학 3, 월간 우리교육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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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1992, 탈식민지시대 지식인의 삶읽기와 글읽기 1리

______, 2007, 다시 마을이다, 또하나의 문화

토니 마이어스, 2005,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앨피